문산재와 왕인
문산재(文山齋)와 왕인(王仁)
박사 왕인은 백제 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28년(373년) 3월 3일 월나군(月奈郡)이림(爾林)의 성기동(聖基洞)에서 왕순(王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의 성기동이다. 이곳 성기동은 '신령스런 바위(靈岩)'로 현묘하게 기봉준령(奇峰峻嶺)을 이루어 강정한 절의와 청고한 기운(氣韻)을 상징하는 월출산(月出山)의 주지봉(朱芝峰) 밑에 낮은 구릉으로 둘서싸인 아늑한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의 북쪽 구릉을 등지고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전 박사 왕인이 탄생한 고택지(古宅址)가 자리잡고 있다. 고택지 앞으로 차고 맑은 성천(聖川)이 흐르고 성천 건너편으로 월출산의 아름다운 지맥(支脈)이 느슨하게 굽어 흐르고 있다. 성천 바로 위쪽에 '구유바위(槽岩)'라 불리우는 기암이 육중하게 자리잡고 고택지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그 유구한 세월을 두고 오직 박사 왕인의 유적지를 보호하고 지켜온 듯이. 이곳 탄생지 주변의 자연환경은 심현(深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묘절(妙絶)한 산세이다.
월출산 주지봉(朱芝峰)의 맑은 정기를 받아 태어난 왕인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총명했다. 준수한 동안에 눈망울은 초롱빛 같았고, 행동 하나 하나가 범상치 않았다. 어린 왕인은 문산재(文山齋)담 밖으로 흘러 나오는 강(講)을 듣고 홀로 글을 깨우칠 만큼 영롱했다고 한다. 마흔이 넘어 인을 얻은 부친 왕순은 인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당시 성기동에서 반마장쯤 되는 '불무동'의 도요지(陶窯址)에서 일을 맡고 있던 그에겐 영특한 인이 자라고 있다는데 그렇게 마음 든든할 수 가 없었다. 총명한 아들 인을 문산재(文山齋)에 입문시켜 대학자로 길러 내겠다는 것이 왕순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당시 문산재는 예로부터 수많은 선비와 명유(名儒)를 배출한 학문의 전당이었다. 학덕이 높은 석학들을 모시고, 가깝고 먼 각처에서 모인 우수한 수학자들이 경학(經學)을 익히는 곳이었다. 규율이 엄격하고 총명한 서생만을 입문시켰다. 근세에도 문산재에서 문·무과에 급제하는 문인재사가 적지 않았다 한다.
월출산 주지봉(朱芝峰)의 맑은 정기를 받아 태어난 왕인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총명했다. 준수한 동안에 눈망울은 초롱빛 같았고, 행동 하나 하나가 범상치 않았다. 어린 왕인은 문산재(文山齋)담 밖으로 흘러 나오는 강(講)을 듣고 홀로 글을 깨우칠 만큼 영롱했다고 한다. 마흔이 넘어 인을 얻은 부친 왕순은 인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당시 성기동에서 반마장쯤 되는 '불무동'의 도요지(陶窯址)에서 일을 맡고 있던 그에겐 영특한 인이 자라고 있다는데 그렇게 마음 든든할 수 가 없었다. 총명한 아들 인을 문산재(文山齋)에 입문시켜 대학자로 길러 내겠다는 것이 왕순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당시 문산재는 예로부터 수많은 선비와 명유(名儒)를 배출한 학문의 전당이었다. 학덕이 높은 석학들을 모시고, 가깝고 먼 각처에서 모인 우수한 수학자들이 경학(經學)을 익히는 곳이었다. 규율이 엄격하고 총명한 서생만을 입문시켰다. 근세에도 문산재에서 문·무과에 급제하는 문인재사가 적지 않았다 한다.
문인재사 많이 배출한 학문전당
문산재 교수들은 왕순의 간청을 받아들여 인을 입문케 했다. 인의 영특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의 나이 여덟살 이제 여기서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거유(巨儒)와 현인이 되는 것이다. 교수와 조교 그리고 서생들은 어린 소년 인의 총명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 의연한 몸가짐에 감탄했다 한다. 그러나 인의 나이 아홉살 되던 해에 아버지 순은 괴질로 세상을 떠났다. 인은 허퉁하고 슬펐다. 어린 인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편모 슬하에서 가세는 기울어져 갔다. 그러나 인은 결코 죄절하지 않았다. 하얗게 밤을 새워가며 글을 읽었다. 쉬는 동안이면 조용히 문산재 부근의 숲속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자 인은 오히려 더욱 어른스러워지고 사려깊은 사람이 되었다. 왕인의 학문은 일취월장의 세로 발전하였다. 그는 15세에 이미「논어(論語)」, 「효경(孝經)」,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에 능통하였다. 17세에 이르러서는 「예기(禮記)」,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 「문선(文選)」등 두루 깊숙이 접근하게되었다. 이제는 스승의 가르침보다 스스로 깊이 사색하고 추구(追究)하는 시간을 더 중히 여겼다.
왕인은 문산재의 뒷산 월대암(月臺岩) 밑 숲속에 조그마한 석굴(石窟)을 발견하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커다란 바위덩이에 불과하지만, 굴 안에 들어가 보면 육중한 바위덩이가 지붕의 구실을 하고 있고 자연석이 사면의 벽을 이루어 마치 아늑한 방안과 같다. 왕인은 이 신비스런 석굴을 자기 서재로 이용하여 남몰래 주야로 학문에 심취해 있었다. 왕인은 아침일찌기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어느틈엔가 자리를 떠나 석굴로 들어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밤이 으슥해지면 다시 석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석굴을 왕인이 소중하게 이용한 서재라 하여 책굴(冊窟)이라 했다. 왕인은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선학들의 권고에 못이겨 과시(科試)에 응하기로 했다. 한 차례의 과시를 통하여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그 당시 백제에는 왕이 수여하는 박사제도가 있었다. 그가운데 오경박사는 역(易)·시(詩)·서(書)·예(禮)·춘추(春秋)등 경학(經學)에 통달한 전문적인 석학에 부여하는 칭호이다. 왕인은 8세에 문산재에 입문한지 10년만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고, 당시를 대표하는 선비가 되었으며, 백제에서도 손꼽히는 학자가 되어 왕으로부터 박사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문산재는 더욱 수학자들이 모여들어 석학들을 배출함으로써 그 명성이 사해에 떨치게 되었다.
왕인은 문산재의 뒷산 월대암(月臺岩) 밑 숲속에 조그마한 석굴(石窟)을 발견하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커다란 바위덩이에 불과하지만, 굴 안에 들어가 보면 육중한 바위덩이가 지붕의 구실을 하고 있고 자연석이 사면의 벽을 이루어 마치 아늑한 방안과 같다. 왕인은 이 신비스런 석굴을 자기 서재로 이용하여 남몰래 주야로 학문에 심취해 있었다. 왕인은 아침일찌기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어느틈엔가 자리를 떠나 석굴로 들어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문산재에 나타났다가 밤이 으슥해지면 다시 석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석굴을 왕인이 소중하게 이용한 서재라 하여 책굴(冊窟)이라 했다. 왕인은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선학들의 권고에 못이겨 과시(科試)에 응하기로 했다. 한 차례의 과시를 통하여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그 당시 백제에는 왕이 수여하는 박사제도가 있었다. 그가운데 오경박사는 역(易)·시(詩)·서(書)·예(禮)·춘추(春秋)등 경학(經學)에 통달한 전문적인 석학에 부여하는 칭호이다. 왕인은 8세에 문산재에 입문한지 10년만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고, 당시를 대표하는 선비가 되었으며, 백제에서도 손꼽히는 학자가 되어 왕으로부터 박사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문산재는 더욱 수학자들이 모여들어 석학들을 배출함으로써 그 명성이 사해에 떨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