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와 박사왕인
일본문화와 박사 왕인
태자와 왕인 일행이 일본 대화국 탄파진(大和國 灘波津)에 도착한 것은 그해 2월 3일 이었다. 백제의 거유 박사 왕인은 일본 황실의 사부(師傅)가 되어 두태자 토도치랑자와 대초요존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에 건너갈 때 가지고 갔던 「천자문」과 「논어」만이 아니라, 모든 경적(經籍)을 가르쳤다. 왕인은 태자의 스승 뿐이 아니라 군신들에게 한학과 경사(經史)도 가르쳤다. 백제인 왕인으로부터 한문을 전해 받은 일본은 비로소 눈이 뜨기 시작했고, 학문의 필요함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충·효·인·의 등 유교 덕목을 깨우치게 되었다. 미개했던 일본은 비로소 한학이 발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문화발전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한편으로, 태자 전지와 왕인이 일본에 건너온지 반년이 지나도록 태자를 백제로 귀국시키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사 왕인은 초조하고 불길한 예감이 밀어 닥쳤다. 그 해(405년) 9월에 백제 아신왕이 서거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왕인은 매우 불안했다.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는 동안 왕위계승을 에워싸고 피를 흘리리라 예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신왕이 서거하자, 왕의 중제(仲弟)훈해(訓解)가 섭정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왕의 계제(季弟)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박사 왕인은 응신천황에게 의젓한 자세로 "폐하는 백제와의 결호(結好)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백제 왕족의 명맥을 끊게 했습니다. 백제 왕족이 끊긴 후 신생 백제와의 수호를 위하여 어떠한 인질(人質)을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응신천황은 "이제는 인질(볼모)은 필요없소, 서투른 일을 저질렀오. 아신왕 재세(在世) 중에 전지를 돌려 보냈어야 했을 터인데. 왕인 길사의 도일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었오"라 대답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포령을 내렸다. 전지태자를 귀국 시키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사 100명을 딸려 귀국길을 호송토록 하라고 하명했다(...倭王以兵士百人衛送 : 三國史記) 귀국길에 오른 태자는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해가 저물어질때까지 섬에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이러한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 혈례를 죽이고 태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이리하여 제17대 전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박사왕인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박사왕인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보내야할 백제왕실의 볼모가 비로소 풀린 것이다. 그러나 왕인은 자기의 책임이 무거워졌다고 생각했다.
일본문화의 개조(開祖) 백제인 왕인은 당시 일본 황실의 스승이자 정치고문이기도 했다 황실의 질서와치국(治國)의 원리를 강론했다. 또한 그는 일본 화가(和歌)의 창시자 이기도 했다. 박사 왕인을 뿌리로 하여 유학은 널리 보급되고 학교교육의 기틀이 되었다. 또한 왕인은 도일할때 대동했던 한단야공(韓鍛治工)·오복사(吳服師)·양주자(釀酒者)·도기공(陶器工)등 45명의 기술자들을 활용하여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의 전수에 힘을 기울였다. 영농 방법을 개발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말(馬)의 사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교통과 운수체계를 정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리하여 왕인은 학문과 윤리도덕을 깨우칠 뿐 아니라 새로운 전문기술을 전수하여 일본의 고대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선현(先賢)왕인은 어느 것에도 통달치 아니함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사상 성인처럼 신격화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고국에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박사 왕인은 세상을 떴다. 백제의 현인이요, 거유였던 그는 미개했던 일본에 처음으로 학문과 도덕,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길을 널리 깨우치고,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기술을 전수하여 일본 문화사상 실로 우람하고 불후의 위업을 남겼다. 일본 조정에서는 문인직(文人職)의 시조인 서수(書首)라는 존칭을 내렸고(故王仁者是書首之祖也 : 日本書紀), 대화십시현(大和十市縣)을 할양하였다. 이곳을 지금백제군(百濟郡) 또는 백제향(百濟鄕)이라 일컫는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박사 왕인을 「문학의 시조」요, 「국민의 대은인」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송표(頌表)하고 숭모해 마지 않는다.
박사 왕인이 세상을 떠난 뒤, 하내국(河內國)에 정착 하였던 그의 후예들은 크게 번성하고 팽창하였다. 박사 왕인의 정신과 위업을 이어받은 그들은 문화면은 물론이요. 정치·경제·기술·불교계 등 각 분야에서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그 후예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
한편으로, 태자 전지와 왕인이 일본에 건너온지 반년이 지나도록 태자를 백제로 귀국시키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사 왕인은 초조하고 불길한 예감이 밀어 닥쳤다. 그 해(405년) 9월에 백제 아신왕이 서거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왕인은 매우 불안했다.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는 동안 왕위계승을 에워싸고 피를 흘리리라 예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신왕이 서거하자, 왕의 중제(仲弟)훈해(訓解)가 섭정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왕의 계제(季弟)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박사 왕인은 응신천황에게 의젓한 자세로 "폐하는 백제와의 결호(結好)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백제 왕족의 명맥을 끊게 했습니다. 백제 왕족이 끊긴 후 신생 백제와의 수호를 위하여 어떠한 인질(人質)을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응신천황은 "이제는 인질(볼모)은 필요없소, 서투른 일을 저질렀오. 아신왕 재세(在世) 중에 전지를 돌려 보냈어야 했을 터인데. 왕인 길사의 도일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었오"라 대답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포령을 내렸다. 전지태자를 귀국 시키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사 100명을 딸려 귀국길을 호송토록 하라고 하명했다(...倭王以兵士百人衛送 : 三國史記) 귀국길에 오른 태자는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해가 저물어질때까지 섬에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이러한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 혈례를 죽이고 태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이리하여 제17대 전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박사왕인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박사왕인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보내야할 백제왕실의 볼모가 비로소 풀린 것이다. 그러나 왕인은 자기의 책임이 무거워졌다고 생각했다.
일본문화의 개조(開祖) 백제인 왕인은 당시 일본 황실의 스승이자 정치고문이기도 했다 황실의 질서와치국(治國)의 원리를 강론했다. 또한 그는 일본 화가(和歌)의 창시자 이기도 했다. 박사 왕인을 뿌리로 하여 유학은 널리 보급되고 학교교육의 기틀이 되었다. 또한 왕인은 도일할때 대동했던 한단야공(韓鍛治工)·오복사(吳服師)·양주자(釀酒者)·도기공(陶器工)등 45명의 기술자들을 활용하여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의 전수에 힘을 기울였다. 영농 방법을 개발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말(馬)의 사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교통과 운수체계를 정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리하여 왕인은 학문과 윤리도덕을 깨우칠 뿐 아니라 새로운 전문기술을 전수하여 일본의 고대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선현(先賢)왕인은 어느 것에도 통달치 아니함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사상 성인처럼 신격화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고국에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박사 왕인은 세상을 떴다. 백제의 현인이요, 거유였던 그는 미개했던 일본에 처음으로 학문과 도덕,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길을 널리 깨우치고,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기술을 전수하여 일본 문화사상 실로 우람하고 불후의 위업을 남겼다. 일본 조정에서는 문인직(文人職)의 시조인 서수(書首)라는 존칭을 내렸고(故王仁者是書首之祖也 : 日本書紀), 대화십시현(大和十市縣)을 할양하였다. 이곳을 지금백제군(百濟郡) 또는 백제향(百濟鄕)이라 일컫는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박사 왕인을 「문학의 시조」요, 「국민의 대은인」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송표(頌表)하고 숭모해 마지 않는다.
박사 왕인이 세상을 떠난 뒤, 하내국(河內國)에 정착 하였던 그의 후예들은 크게 번성하고 팽창하였다. 박사 왕인의 정신과 위업을 이어받은 그들은 문화면은 물론이요. 정치·경제·기술·불교계 등 각 분야에서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그 후예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